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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목
    제14회 포은문화제(포은골든벨 예상문제안내)
  • 작성자
    용인문화원
  • 작성일
    2016.04.20
  • 파  일

본문 내용

포은골든벨 ○, × 문제
1. 조선시대 지방교육기관인 향교는 서울의 사학(四學)과 마찬가지로 성균관(成均館)의 하급 관학(官學)으로서 문묘(文廟)·명륜당(明倫堂) 및 중국·조선의 선철(先哲)·선현(先賢)을 제사하는 동무(東廡)·서무와 동재(東齋)·서재가 있어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庶類)가 수학하였습니다. 향교는 각 지방관청의 관할하에 두어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에는 각 90명, 도호부에는 70명, 군(郡)에는 50명, 현(縣)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고,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두도록 《경국대전》에 규정하였습니다. 이 향교는 주로 그 지역의 유림들이나 문중에서 설립하였습니다. (X)- 나라에서 세운 관학이다.

2. 원삼면 사암리에는 세 개의 큰 돌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이곳에서 마을의 제사를 지내거나 정월 보름날에 치성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농촌테마파크 근처에 위치한 이 세 개의 큰 돌을 ‘고인돌’이라 부르며 마을을 표시하는 표시석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X)-고인돌이 아닌 선돌

3. 원삼면 농촌테마파크 옆에 위치한 사찰인 법륜사 관음전 앞마당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석탑이 조성된 이후 이 자리에 계속 있어왔습니다. 1996년 이후 이 석탑을 기반으로, 석탑이 있는 곳 주변에 법륜사가 창건되었습니다(X)

-이 탑은 절이 창건될 때(1996~2005) 서울에 사는 신자에게 보시 받은 것으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자세한 유래나 원래 탑이 있었던 사찰이 어느 곳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4. 왕의 능이나 높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의 묘에는 석인이나 석수 묘비 석등 등 여러 석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손에 패와 같은 홀을 들고 있는 석물은 문인석, 갑옷을 입고 검을 쥐고 있는 석물은 무인석이라고 부릅니다. (O)

5. 처인구 백암면에는 이 박물관에는 전통 상례 문화와 세계 각국의 상례문화와 관련된 유물을 만나볼 수 있으며 유서쓰기, 입관 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전통 관,혼,상,제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각종 유물과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박물관의 이름은 세중옛돌박물관입니다. (X) 예아리박물관- 예가 있는 울타리라는 뜻

6.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있는 수원교구 소속 성지로 ‘숨겨진 동네’, 또는 ‘숨겨진 마을’ 이라는 뜻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에 숨어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조성된 교우촌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소년시절 신앙을 익히고 사제성소의 꿈을 키웠던 이곳은 ‘미리내 성지’입니다. (X) 은이성지

7. 조선시대에 안성 죽산현에 속했던 5일장으로, 1970년대 중반까지는 주변지역을 대표할 만큼 활발한 소 거래가 이루어졌고 각지에서 의류, 생선, 막걸리, 과일장수들이 몰려들어 크게 번창하였으며 돼지와 가축, 쌀시장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아직까지도 옛시골 장터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재래5일장으로 이장을 ‘김량장’이라고 부릅니다. (X) 백암장

8. 이 축제는 ‘삼천갑자 동방삭’을 테마로 하는 축제입니다. 동방삭은 갑자년을 삼천번 겪으며 18만년이나 살았다는 전설의 인물로, 그가 염라대왕의 눈을 피해 양지면에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에 근거해 열리는 축제입니다. 동방삭이 수지지역 하천으로 나들이를 갔다가 숯을 물에 씻어 희게 만들고 있는 사람을 보고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지만 숯을 물에 씻는 사람을 처음 봤다’라고 말하여 저승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이러한 삼천갑자 동방삭을 모티브로 열린 축제는 ‘양지골 정월 대보름 달맞이축제’입니다. (O)

9. 원삼면 미평리에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가장 규모가 큰 석불이 서 있습니다. 석불은 전체가 하나의 큰 돌로 만들어졌는데, 머리위에는 보관 대신 자연석을 올려 놓았고 얼굴은 네모모양에 가깝고 신체에 비하여 큰 편입니다. 개인이나 마을의 안녕을 빌던 민불로 마을 사람들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불상이 한손에 약병을 들고 서 있는 부처님의 모습이기에 어떠한 병도 모두 고쳐주시는 약사여래불이라 불렀습니다. (X)-미륵불. 미륵이 사는 마을

10. 향교는 유교문화의 바탕위에서 설립, 운영된 교육기관으로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하여 지방에 세운 중등과정의 공립학교입니다. 공자와 여러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의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이 향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양반 자녀인 16세 이상의 남녀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X) -16이상의 남자로 양반의 자제나 향리를 원칙으로 하였다.

11. 1930-40년대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던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는 카프계열의 작가 안막과 결혼하여 원삼면 문촌리에서 6년 동안 살았습니다. 최승희는 승무, 칼춤, 부채춤, 가면춤 등 고전무용을 현대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서울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우리나라의 전통춤을 체계화하고 많은 청소년들에게 무용을 지도하며 자신의 춤을 전수하였습니다. (X)-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하고 북한에서 청소년들에게 무용을 지도하였다.

12. 골배마실 천주교 성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가 되었던 김대건 신부가 살던 집터가 현재 양지 컨트리클럽 골프장 한쪽에 보존되어 있으며 그의 석상과 제대, 초가집과 어머니 고씨의 모습을 새긴 부조가 남아 있습니다. 골매마실 성지는 은이성지와 함께 전담신부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O)

13. 원삼면 문촌리에는 조선 정조 대의 무신이었던 이주국 장군의 고택이 있습니다. 이 고택은 1753년 영조 임금 29년에 지어진 것으로 고택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문간채가 일자로 길게 늘어서 있는데 두 칸의 방과 네 칸의 광으로 꾸며졌습니다. 그 앞에는 네 칸의 사랑채가 자리를 하고 있으며 안채의 마당이 있습니다. 이 고택은 지금도 그의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X)-100년 전까지는 후손이 살았다 하나 지금은 정병하씨의 소유)

14. 이주국 장군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전주이고 조선2대 임금인 정종의 서자 덕천군의 후손입니다. 건장하고 뛰어난 용모와 강직한 성품으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정조로부터 오백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는데, 통신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원삼면 문촌리에 있는 이주국 장군의 묘에는 무신이었기에 석상으로 무인석을 세우고 그 뒤에 왼쪽에 양 모양, 오른쪽에 말 모양의 석상을 세웠습니다. (X)-무인이었지만 문인석을 세움, 양석, 말석을 모두 세운 것을 특이한 경우이다.

15. 처인구 원삼면 맹리 일대는 양천 허씨가 입향하여 450년 이상 세거하고 있는 동족촌입니다. 특히 맹골과 능안마을은 허균과 ‘허씨5문장’ 이 있는 양천허씨 세장지가 위치한 곳으로 유명합니다. ‘허씨 5문장’은 호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을 비롯한 누나 허난설헌과 허균의 삼형제 허성, 허봉, 허균을 일컫는 것으로, 원삼면 맹리에는 허씨 5문장의 묘소가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X) 허난설헌의 묘는 광주 초월리에 있다.

16 .1418년 서해안에 왜구가 창궐해지자 세종대왕은 최윤덕 장군을 삼도도통사 유정현과 함께 1419년 병선227척 군사 1만7천명으로 발진하여 대마도로 보내어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x)- 최윤덕이 아니고 이종무를 보냈다.

17. 정암 조광조 선생님은 조선중기 중종 때의 문신으로 도학정치를 기반으로 한 사회개혁을 시도하다가 사림파의 모함을 받아 전라도 능주(화순)로 유배되고 한 달 쯤 뒤 홍경주 등의 강경한 주장으로 사약을 받고 절명하였습니다. (x) 훈구파

18. 정암 조광조 선생의 신위는 포은 정몽주 선생님과 함께 죽전동 죽전서원에 배향되어 있었으나, 병자호란으로 불탔으며 후에 정몽주 선생님은 충렬서원에, 조광조 선생님은 심곡서원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x) 임진왜란

19.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화를 입은 4대 사화가 있습니다. 그 중 1519년(중종14)11월에 남곤, 심정 등의 재상들에 의해서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이 화를 입은 사건을 기묘사화라고 합니다. (O)

20. 민영환 열사는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1월30일에 유서를 남기고 자결을 하였습니다. 당시 자결한 이후 피 묻은 칼을 상청 마루에 두었는데 이듬해 마루의 피 묻은 곳을 뚫고 소나무가 올라와 자라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절송’이라고 부릅니다. -(x) 대나무, 죽절

21. 대한제국의 육군 정위였던 김혁 장군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3.1만세 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의용군과 대한독립군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펼쳤습니다. 1920년에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를 이끌었고,1925년에는 신민부의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신민부에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자 김혁장군은 교장에 김좌진 장군은 교감을 맡아 약 500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습니다. 1928년 신민부에서 총회를 개최하던 중 일제경찰에게 잡혀 감옥에서 돌아 가셨습니다.(X) 우리나라에 와서 돌아가셨다.

22. 광교산 동쪽에 서봉사지라는 고려시대 절터가 있습니다. 고려시대 이 곳 주지스님이 국왕을 강학했다는 일설도 전해집니다. 조선 태종 때는 천태종의 자복사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사찰입니다. 이 곳에는 고려 명종 15년에 세워진 탑비가 남아 있는데, 스님이 돌아가시자 고려 명종 임금께서 ‘현오’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게 했다는 ‘현오국사탑비’는 현재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X) 보물9호

23. 용인에는 2개의 향교가 있습니다. 이 중 용인향교는 구성향교라고도 지칭되지만 용인향교가 올바른 명칭입니다. 건립 연대는 대략 조선 정종2년(1400)경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명륜학원을 개설하여 지역사회의 인재 양성에 기여하였습니다.(O)

24.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학자 정암 조광조 선생을 기리기 위해 ‘조광조 문화제’가 2011년부터 수지구 심곡서원 일대에서 개최 되었습니다. ‘큰선비 조광조’라는 특별공연과 함께 정암선생을 기리는 서예전도 함께 열려 뜻 깊은 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x) 정암문화제

25. 수지구 죽전동 일대에 수백 년을 이어온 전통놀이 줄보맥이가 2009년 경기 민속예술제에 용인시 대표로 출전하여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죽전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온 김응호씨가 중심이 되어 오랫동안 잊혀진 우리 문화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대단합니다. 죽전 줄보맥이는 화합과 풍요를 기원하는 공동체 문화행사로 백중날에 해오고 있는 민속놀이입니다. (x) 정월 대보름

26. 김량천은 용인시 처인구 해곡동 산지의 문수샘에서 발원하여 용인시 중심부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통하여 흐르다 초월읍 지월리에서 곤지암천과 합류하여 서하리에서 한강수계인 팔당호로 유입되는 길이 22.5㎞의 국가하천입니다.《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소내'라는 뜻의 우천(牛川)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용인군 군청소재지였던 김량장리(지금의 김량장동)를 관류한다 하여 김량천(金良川)이라 불렀습니다. (O)

27. 우리나라에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속출하였습니다. 이중에서 역사상 최초의 항일 순국열사는 계정 민영환입니다. (x) - 국은 이한응

28. 모현면 오산리에 오인수 의병장을 중심으로 아들 오광선 장군과 딸 오희영, 오희옥 등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을 기리는 <의병장 해주 오공 인수 3대 독립항쟁 기적비> 가 세워져 있습니다. (X) - 원삼면 죽능리

29. 오달제는 대한 제국 육군 무관학교 출신으로 3·1운동에 참여한 후 일제의 경찰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한 후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하고 독립군 양성에 노력하였습니다. (x) - 김혁

30. 유근은 1898년 남궁억 등과 함께<황성신문>을 창간하였고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신문에 게제하는 등 일제의 부당성을 폭로하였습니다. (O)

31.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시, 서(글) 화(그림)에 모두 능숙하도록 공부했다고 합니다. 약천 남구만 선생도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림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서 나비를 잘 그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나비’라는 별명까지 얻은 화가였습니다.(x) - 일호 남계우

32. 용인에는 2개의 향교와 3개의 서원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한천서원은 정조 때 지방유림의 공의로 도암 이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동면 천리에 창건하여 사액되었으나, 1868(고종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권되었습니다.(x) - 복권되지 못했다

33. 사례편람은 조선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도암 이재 선생이 지은 관혼상제에 관한 종합참고서입니다. 이 책은 이름 그대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사례 참고서로서 조선 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예서로 평가됩니다. (O)

34. 서리 중덕 백자 요업지는 1984년 제1차로 호암미술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벽, 건물지, 요지 등 대체적인 규모까지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이 서리 백자 요업지는 10세기를 전후한 가마터로 밝혀졌으며, 조선시대부터 백자를 굽던 가마터입니다 (x) -고려시대

35. 고려 고종 18년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을 시작으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는 1270년까지 40여년을 몽고에 대한 항쟁이 이루어졌는데, 고종 19년 9월 몽골은 제2차 침공을 감행하였고, 몽골장수 살리타이는 중원경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이르러 김윤후와 부곡민들에게 의해 화살을 맞고 사살당함으로써 몽골의 제2차 고려침공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큰 승리는 거둔 이곳은 할미산성입니다(x) - 처인성

36. 이곳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대웅전 뒤편에 용이 살았다는 굴이 있어 굴암절이라고도 불리기도 합니다. 신라 문성왕 때 염거선사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3층석탑 1기와 보살상, 철인 3위를 조성하면서 중창한 이절은 용덕사입니다.(O)

37. 용인에는 대한불교열반종의 총본산으로 1970년 실향민인 김해근 법사가 부처의 공덕으로 민족화합을 이루기 위해 세운 호국사찰로 법륜사가 있습니다. (x) - 와우정사

38.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 문화복지행정타운 내에 있는 복합문화시설로 용인시립예술단, 용인문화원 등의 단체가 들어서 있다. 3층에 위치한 마루홀은 300석 규모의 공연장으로 2005년에 문을 열어 아동극, 가족극 위주의 다양한 공연물을 선보이고 있는 이곳은 용인문예회관입니다. (x) - 용인시 문화예술원

39. 몽골과의 29년 전쟁에서 첫번째 승리로 기록되어 있는 처인성 전투를 기념하고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함으로써 자랑스런 처인성대첩을 널리 알리고, 용인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취지에서 용인 문화원에서 개최하고 있는 지역문화축제는 처인성문화제입니다 (O)

40. 동홰놀이는 팔월 대보름인 한가위를 맞이하여 마을 단위로 행해지는 풍농과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로서 이동면, 양지면 등 용인시 동부지역에서 전승되어오던 대표적인 민속놀이입니다.

(x) -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놀이

41. 교통이 발달한 곳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여러 물건이 모여 시장이 만들어집니다.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시장이라는 중심지는 점점 더 커지게 되지만 오늘날처럼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면 시장은 중심지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답니다. 이렇게 중심지는 사람들이 그곳을 얼마나 이용하느냐에 따라 크기가 더 커지거나 작아지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습니다. 조선후기에 교통이 발달한 용인의 김량에도 장이 열리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에는 송전에도 장이 열렸습니다. 이 때 용인의 김량에 열리던 장을 용인장이라고 불렀습니다. (x) 김량장

42. 영조와 정조 치하에서 경륜 높은 남인계 정치가이자 명재상으로 활동하였던 사람으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하려는 비망기를 내렸을 때 목숨을 걸고 이를 막아 철회시킨 사람은 다산 정약용입니다. (x) 번암 채제공

4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우봉 자는 희경 호는 도암, 또는 한천으로 숙종 28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습니다. 특히 예학에 밝아서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는데, 저서로는 도암집을 비롯하여 사례편람, 어류초정 등의 책을 편찬한 사람은 도암 이재 선생입니다. (O)

44. 고려 시대 후기의 대 문장가인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명종이 신하들에게 <소상팔경>시를 짓도록 하였을 때 ,어린 나이로 장편을 지어 이인로와 더불어 절창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주필(글씨를 흘려서 빨리 씀)로 이름난 이 사람은 김부식입니다. (x) 진화

45. 와불로 유명한 절로서, 8m에 이르는 거대한 불두와 통일의 탑, 서울 올림픽 때 타종했던 12톤에 이르는 통일의 종이 있는 곳입니다. 처인구 운학동에 있는 이 절은 와우정사입니다. (o)

46.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지배자의 무덤이라고도 하고, 주술적인 의미에서 권력을 상징한다고도 합니다. 이것은 모현면 왕산리와 양지면 주북리 등에 자리하고 있는데, 한자로는 지석묘라고 부르는 이것을 순수 우리말로는 솟대라고 합니다.

정답 : × 고인돌

47.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나라 고인돌의 종류는 탁자식과 바둑판식이 있습니다. 모현면 왕산리 고인돌유적은 탁자식으로 보존이 매우 잘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탁자식 고인돌을 축조할 때 제일 마지막으로 무덤방 튼튼하게 막는 작업으로 굄돌로 ‘마무리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것을 마구리돌이라고 부릅니다.

정답 : ○

48. 외국어대학교 왕산캠퍼스 뒷산에 사주당 이씨의 묘가 있습니다. 18세기의 신여성이라 부를 만큼 유학을 공부하고 글 읽기와 쓰기를 좋아하여 문장에 뛰어난 그녀는 결혼 후 집필에 몰두하여 아이와 어머니들을 위한 유아아동도서를 저술하였습니다.

정답 : × 태교신기를 만들었다

49. 조선시대 여성들은 이름을 부르기보다 성씨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성들의 호는 대체적으로 그들이 거처하던 집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면 성씨 뒤에 호를 붙여서 신사임당, 강정일당, 이사주당 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여성들의 호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만 붙여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정답: × 윗어른이 붙여준다

50. 모현면 갈담리에는 약천 남구만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약천 선생은 조선 숙종 때 ‘농부가’라는 시조를 지어서 임금과 백성을 아우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농촌생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시조가 현대에는 ‘동창이 밝았느냐’ 라는 시조창으로도 불리면서 더 유명해졌습니다.

정답: × 권농가

51. 약천 남구만선생은 조선 숙종 때 71세의 나이에 용인으로 낙향하여 남은 생을 사셨습니다. 이곳 모현면 갈담리 파담 마을은 약천선생의 많은 일화가 남아 있는 곳이며 근처에 선생의 별묘가 있어서 경안천 건너 산자락을 약천선생의 이름을 딴 구만이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정답 : ○

52. 모현면 오산리는 해주오씨의 집성촌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의 한분으로 청나라 심양에서 목숨을 잃으신 추담 오달제 선생의 묘와 그의 부친, 증조, 고조까지 모셔져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추담 선생의 묘는 시신이 없는 가묘이며 평소에 지녔던 주머니만 묻혀있다 해서 묘 앞에는 대낭장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정답 : ○

53. 포은정몽주 선생의 묘 입구에는 신도비와 비각이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 붉은색으로 칠이 되어있고 높은 창살 같은 모양의 문을 지나야 묘역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이 문을 지나면 신성한 묘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마음가짐을 경건하게 해야 하는데, 여기서 창살 같은 문의 이름은 붉은 색이라고 해서 ‘불살문’이라고 합니다.

정답 : × 홍살문

54. 충렬서원은 포은선생의 뜻을 기리며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보기위한 유생들이 학문을 닦았던 교육기관이었습니다. 나라에서 인정하는 사액을 받았으나 지역 유림들에 의해 운영된 서원이었기에 사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에 맞서 사학에 반대가 되는 관학이 있었는데 이것은 향교라고 합니다.

정답: ○

55. 충렬서원의 구조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앞에는 강당이 있고 구릉지 위쪽 뒤편으로는 사당이 있습니다. 강당에서는 학생들이 공부를 하던 곳이고 사당에는 제사를 모시던 곳입니다. 현재 충렬서원의 사당에는 총 18분의 우리나라 선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서 봄과 가을에 제를 지내고 있다.

정답: × 총 4명이 있다. 정몽주, 오달제, 정보, 이시직

56. 한국등잔박물관은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등잔을 테마로 한 곳입니다. 1층에는 민속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각종 시대별 등잔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옛 정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야외 연못과 정자, 농경전시관은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고 박물관 외관의 모습은 수원화성의 공심돈 모양의 본을 따서 만들었기에 눈에 익숙한 모습입니다.

정답 : O

57. 포은 선생은 1337년 경상북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고려말 무너져 가는 고려를 위해 외교관으로서 젊은 후학을 양성하는 성리학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셨다. 뿐만아니라 시와 문학에도 뛰어나시어 여러 수의 시조를 남기셨는데 대표적으로 ‘절의가’가 있습니다.

정답 : X 단심가

58. 포은선생의 묘가 이곳에 쓰이게 된 것은 선생이 돌아가신지 십 수 년 지난 후 선생의 묘를 이장하기 위한 천장행렬이 개성에서부터 내려오다가 지금의 수지구 풍덕천동 쯤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는 도중 회오리바람이 불어 상여를 장식하던 아름다운 꽃송이가 날아가 지금의 이곳에 떨어지자 묘를 쓰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정답 : × 명정

59. 포은선생 묘소 바로 옆에는 저헌 이석형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이 분은 포은선생의 증사위 되시는 분으로 세조가 총애하던 신하였습니다.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예종 때에는 훈작을 받으시고 연성부원군까지 올랐습니다. 그래서 저헌 선생 묘역 석물 중에는 왕이 하사한 무인석 2기가 쌍으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답 : ×

60. 에버랜드 뒷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호암미술관은 1982년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입니다. 약 200여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이 중에는 국보와 보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술관 앞으로 펼쳐지는 연못과 정원은 우리나라 전통정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아름다움이 있고 사계절 심신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정원의 이름을 ‘희원’이라고 합니다.

정답 : ○

61. 호암미술관의 희원은 우리나라 전통정원의 기법을 그대로 적용하여 만든 곳입니다. 자연친화사상, 풍수지리사상, 유교사상, 불교사상, 도교사상까지 두루 섭렵한 곳으로 ,궁궐에 있던 정자와 연못과 더불어 불국사모양의 본관 건물과 그 옆에는 우리나라의 대표급인 석가탑이 있습니다.

정답: × 다보탑

62. 호암미술관 입구에는 아름드리 벚꽃나무가 줄을 지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수건너 향수산에도 봄이 되면 벚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서 이곳을 용인8경중의 하나로 선정하고 있습니다. 매년 5월이 되면 벚꽃을 주제로 하는 축제가 열리는데 이것을 ‘벚꽃문화제’라고 합니다.

정답 : ○

63. 모현지역에는 용인의 어느 지역보다 많은 역사인물들의 묘역이 많이 있다. 포은선생을 비롯하여 약천 남구만선생, 추담 오달제선생, 홍계희 선생, 이일장군, 사주당 이씨, 유희 선생의 묘가 있다. 또한 조선 중종때 개혁에 실패하여 목숨을 잃으신 조광조 선생의 묘가 있다.

정답: × 없다

64. 포은문화제는 3일 동안 포은선생 묘역에서 열립니다. 올해로 14회째 열리는 포은문화제는 천장행렬을 하이라이트로 해서, 한시백일장, 청소년 국악경연대회와 더불어 다채로운 공연과 다양한 체험행사 및 풍성한 먹거리가 일품입니다. 그러나 포은선생의 제례는 묘역에서 지내지 않고 충렬서원에서 지내는 것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정답: × 묘역에서 지낸다

65. 태종 이방원이 포은선생을 회유하기위해 하여가를 읊었고, 그에 답가로 포은선생은 단심가를 지었는데, 시조의 내용은 까마귀 검은 곳에 백로가 가지 않는다는 구절로 되어있습니다.

정답: × 위 내용은 백로가

66.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할 목적으로 1996년 개관하였습니다. 전통문화를 전공한 20여명의 학예직을 선발해 고고, 역사문헌, 미술사, 민속생활 등 전 분야의 자료를 폭넓게 확보하여 연구, 전시하고 있으며, 경기도내의 문화 유적에 대한 기본조사와 발굴조사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6개의 상설 전시실과 1개의 기획전시실, 연구시설, 수장고, 도서실, 강당 교육실 등이 있습니다. 현재 18.000여점의 소장품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기도 박물관은 국립박물관입니다. ×

67. 삼국시대부터 용인의 지명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습니다. 백제 때는 ‘멸오’라 하였고, 고구려 때는 ‘구성’, 신라 때는 ‘거서’라 불렀습니다다. 고려를 거쳐 조선 태종 때에 ‘용인’이라는 지명이 탄생되었는데 용인의 ‘용’자는 고려시대 용인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

68. 용인은 1996년 군에서 시로 승격되었습니다. 2005년 10월 31일 처인구, 기흥구, 수지구 등 3개 구가 설치되었는데, 수지출장소가 수지구로 승격되었고, 기흥읍과 구성 읍이 기흥구로, 동부지역이 처인구로 각각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세 개의 구 중에서 수지구에는 아파트와 빌딩이 많아 면적이 가장 넓다. ×

69. 용인 서쪽의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에는 바라산, 백운산, 광교산, 형제봉, 등 400m 이상의 산들이 있고, 동쪽에는 남한산성에서 뻗어 나온 법화산, 석성산, 부아산, 함봉 산이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사궁산, 쌍령산, 경수산, 구봉산, 등이 안성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 많은 산 중에서 높이가 가장 낮고 용인의 서쪽을 지키고 있는 산은 광교산입니다. ○

70. 용인 서쪽의 탄천과 신갈천은 신갈저수지를 만들고, 용인 중앙의 금학천과 경안천, 진위천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저지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용인시의 동남부에는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청미천이 동남쪽으로 흐릅니다. 용인을 가로 지르는 경안천은 경기도 광주와 팔당댐을 지나 한강으로 흐르는데 경안천의 발원지는 안성 칠장사입니다. ×

71. 용인은 2개의 고속도로와 4개의 국도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서북쪽에서 남북으로 지나고 영동고속도로가 신갈에서 동서로 지나고 있습니다. 국도 45호선이 남북으로 지나고 국도 42호선이 동서로 지나고 있습니다. 또한 42호선과 연결되는 17번국도와 용인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민자 고속도로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신갈에서 경부고속도로로 통하는 톨게이트 이름은 신갈톨게이트다. × 수원신갈톨게이트

72. 용인을 상징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시화는 분홍철쭉, 시조는 꿩, 용인시 마크는 첨단기술과 녹색자연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용인을 상징하는 나무는 벚나무입니다. ×

73. 용인에는 전통재래시장이 열린다. 백암지역에서 열리는 백암5일장은 12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고 있는데, 1일과 6일에 열리는 백암 장은 한때 우시장으로 전국에서 유명세를 떨칠 정도로 붐볐다고 합니다. 특히 백암지역은 용인토종순대로 유명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백암5일장과 더불어 현재까지 전해내려 온 전통재래시장이 있는데 이는 수지 5일장이다. X 김량장

74. 용인은 1970년부터 돼지사육두수 전국 1위가 될 만큼 돼지 사육을 많이 했던 고장입니다. 지금도 백암지역이나, 포곡, 모현지역에 가면 돼지 사육농가를 볼 수 있습니다. 돼지 부산물로 만든 용인 토종순대는 전국으로 널리 분포되어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음식입니다. 용인토종순대의 맛을 느끼며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곳은 ‘죠스떡볶이’입니다. ×

75. 조비산은 백암면 용천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에 ‘용인의 남쪽 끝에 자리 잡은 이 산은 뾰족한 바위로 되어있다. 이 산에는 흰뱀(백사)가 많이 살고 있어서 한 여름 비가 많이 내려 큰물이 지면 산 아랫동네로 뱀 떼가 내려와 사람과 가축에게 해를 입혔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새가 날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산을 역적산, 또는 쪽비산 이라고도 부릅니다. ○

76. 이곳은 에버랜드 뒤편에 위치해있는데, 이 곳 뒤쪽으로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백련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 사립미술관인 호암미술관을 배경으로 얼마 전 ‘벚꽃문화제’가 열리기도 하였는데 용인 팔경 중 여덟 번째 해당하는 이곳의 행정구역은 가실리라고 합니다.


77. 농촌테마파크에서 해마다 봄에 피는 꽃을 주제로 축제가 열립니다. 특히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는 가정의 달 5월 첫째 주에 열리며. 여러 가지 행사가 진행됩니다. 봄꽃의 향연속으로 빠져드는 이 축제의 이름은 ‘용인시농촌축제’ 입니다. ×

78. 이 유적은 용인시 일대에서 발견된 예가 없는 대교모 고분군으로, 여주의 매룡리, 파주의 성동리 고분에 필적하는 대규모 구분군으로 보정동 일대가 6세기 중엽 경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고구려의 요충지 중 하나였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학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매우 의미 있는 유적으로 판단하여 200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X) 신라의 요충지

79.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에는 일명 용화사지 또는 획주사지라고 전해지는 절터가 있습니다. 이 절터에는 미륵입상이 아미타전이라는 전각에 봉안되어 있는데, 이 미륵입상은 장승이나 문인석을 방불케하는 모습이어서 장승의 일종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조선후기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이 불상은 직육면체의 몸통에 장방형의 얼굴과 높은 관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X ) 용화전에 봉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널리 유행하는 미륵신앙의 일종으로 조성

80. 1922년 대구에서 독실한 카톨릭 집안의 막내로 출생하여, 51년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1969년에는 교황 바오르 6세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교회쇄신과 현실참여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였습니다. 2009년 2월에 선종한 이분은 김대건 신부입니다. (X) 김수환추기경

포은골든벨 문제
1. 처인구 맹리에는 조선시대 최고 뛰어난 문사로 알려진 허균과 그의 아버지 허엽, 두 형 허성과 허봉의 묘가 있습니다. 그 중 조선 사회의 절대 권위에 도전한 대표적 풍운아이자 이단이며 천재였던 허균이 쓴 소설로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그의 개혁사상을 반영하며 적서구분으로 인한 신분적 차별을 비판하면서 탐관오리에 대한 징벌과 가난한 서민들에 대한 구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소설의 주인공인 이 사람은 율도국의 새로운 왕이 됩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홍길동전)

2. 조선 전기의 문신인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강원도 관찰사로 강릉에 있으면서 동해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해 두부를 만들어 먹고 손님에게 대접했습니다. 그 두부가 아주 맛있다는 소문까지 나자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이 두부의 이름은 허엽의 호를 따 ‘00두부’라 하였습니다. 이 두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초당두부)

3. 처인구 원삼면 맹리에는 허균을 비롯한 허씨 5문장 묘역이 있으며 이곳에 이 사람의 시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27살에 요절한 조선의 3대 여류 시인 중 한명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 의해 명나라에서 그녀의 시 213수가 실린 시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일본에서도 간행되었습니다. 허균의 누이인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허난설헌)

4. 이 사람의 묘는 백암면 석천리에 있으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전라도 부안 땅에 내려가 초야에 묻혀 학문 연구와 저술에 일생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 곳에서 백성들의 사회 실상을 직접 체험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가 잘 살고,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이루기 위한 국가체제의 개혁안인 ‘반계수록’을 저술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유형원)

5. 조선 정조 임금 대의 어영대장을 지낸 무신으로 처인구 원삼면 문촌리에 이 사람이 살던 가옥이 있습니다. 이 가옥은 안채 남쪽 지붕의 망와에 ‘건륭 18년 계유일 조작’이란 글이 양각된 기록으로 보아 영조 29년, 1720년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주국 장군)

6. 이 곳은 양지면 남곡리에 있는 천주교 성지로 ‘숨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살며 형성된 교우촌입니다. 또, 우리나라 최초 천주교 사제가 된 김대건 신부가 사제성소의 꿈을 키웠던 곳이며 사제가 되어 돌아온 후 맨 처음 미사를 드린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입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은이성지)

7. 문수산 정상에서 남쪽 내리막길로 약 150m 지점에 두 개의 암벽에 각 1구씩 서로 대칭을 이루며 양각으로 보살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 그 사이 중앙에 입체의 불상이 조성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바위에 새겨진 이것의 이름은 무엇이라 부를까요? (문수사지 마애보살입상)

8. 처인구 원삼면 미평리에는 마을 한가운데 오른손은 가슴에 손바닥을 안쪽으로 향하고 왼손에 감로정병(약병)을 들고 있는 큰 규모의 석불인 약사여래입상이 있습니다. 석불 앞에서 자연석 불단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제물을 차려 예불을 올리거나 치성을 올렸는데 불상 주의를 빙 둘러 돌기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불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곳 미평리는 ‘미륵부처가 서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사람들에게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이름은 무엇일까요? (미륵뜰)

9. 이 곳은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하여 지방에 세운 조선시대 중등과정의 공립학교인 향교로 용인에 있는 두 곳 중 한 곳입니다. 1910년대 현 양지초등학교의 전신인 ‘추향의숙’이 이 곳에 설립되었고 1950년대에는 용동중학교의 전신인 ‘신생학원’이 이곳에서 운영되어 20세기 중반까지 양지 지역의 교육기능을 담당하였던 곳입니다. 이 향교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양지향교)

10. 원삼면 사암리에 나란히 서 있는 커다란 돌로 “어느 부잣집에서 탁발승을 구박했더니 중이 혼자말로 ‘지금 그곳에 큰 돌 셋을 세우며 아주 큰 부자가 될 것이다’라 하기에 그대로 했다가 부자가 쫄딱 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마을사람들은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보호하며 마을의 제사를 지내거나 치성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사암리 선돌

11. 마을이나 절 입구, 길가에 세워 놓은 사람머리 모양의 기둥을 말하며 장승이라고도 부릅니다. 장승과 비슷한 일을 하는데, 융통성이 없어 답답한 사람을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벅수)

12. 옛 사람들은 무덤을 지키는 수호석으로 호랑이, 사자, 말, 양과 같은 동물모양의 석물을 묘 앞에 세웠습니다. 그것들 중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후손들이 많이 번성하게 해 달라는 기원을 담은 석물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동물모양의 석물일까요? (임신한 암 양)

13. 우리나라의 전통 장례 문화로 지금의 영구차(운구차)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곳에 관을 넣고 여러 사람들이 이것을 짊어지고 무덤까지 갑니다. 워낙 비용부담이 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마을에서 공동으로 관리하고 보관하는 이것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상여)

14. 상여가 나갈 때 앞에서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어~허노 어~허노 , 구성진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상여꾼들의 소리는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이 세상을 떠나는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유가족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때 상여의 앞이나 위에서 상여꾼을 지휘하는 사람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선소리꾼 또는 요령잡이)

15.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난 후 용인에서도 3월 21일 새벽 3시에 주민 1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세 운동이 일어나 용인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으며 현재 이곳은 3∙1만세운동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해마다 이곳에서 기념식을 갖고 만세운동모습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용인에서 만세 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된 이곳은 어디일까요? (좌전고개)

16. 처인구 원삼면에 있는 이곳은 용인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홍보하고 도시인들에게 정서적인 안정을 제공하기위해 식물원을 구축하고 요소요소에 원두막과 같은 농촌 풍경을 자아내는 각종 설치물을 조성하여 자연스럽게 농촌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용인농촌테마파크

17. 처인구 백암면에 있는 식물원으로 1,000여 종이 넘는 자생식물을 각각의 생태 환경에 맞게 고려하여 심고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계절에 따른 야생식물을 볼 수 있는 곳으로 2001년 희귀멸종위기 식물 서식지 및 보전기관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한택식물원

18. 이곳은 MBC의 대표적인 역사드라마를 촬영하는 곳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 시대별 건축양식을 역사적인 고증을 바탕으로 실제에 가깝도록 재현했으며 2011년부터 외국인관광객과 내국인에게 개방되어 한류 문화의 중심지이자 관광지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대장금파크 .....얼마전까지 MBC드라미아 였다.)

19. 이 날은 농부들이 봄부터 여름까지 농사일을 하다가 음력 7월 보름에 일손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고 각종 놀이를 즐기며 하루를 보내던 농민들의 여름철 명절로 백암에서는 장이 열려 백암 사람뿐 아니라 인근의 죽산, 이천 사람들까지도 몰려들어 난장판이 벌어지고 남사당패의 공연이 펼쳐지는 등 흥미로운 오락과 흥행이 있어 농사에 지친 주민들에게 최대의 잔칫날이었습니다. 이 날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백중)

20. 조선시대 안성 죽산현에 속했던 전통 장으로 배관장, 배감장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전국 최대의 우시장이 들어서 활발하게 소 거래가 이루어졌고 각지에서 의류, 생선, 막걸리, 과일장수들이 몰려들어 크게 번창하였다고 합니다. 1일과 6일에 열리는 전통 5일장으로 맥을 이어가는 이 전통시장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백암장

21. 조선 초기 무신으로 14세 때 을진장군이던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고, 1397년에 옹진만호가 되어 서해안에서 왜구를 물리친 후 상장군에 올랐습니다. 왜구의 창궐이 극심해지자, 1419년(세종1년) 삼군도체찰사로 왜구의 뿌리를 뽑고자 원정군을 이끌고 당시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였습니다. 과천에서 병사로 돌아가신 이 분의 묘소는 고기동(고기리)에 있습니다. 이장군은 누구일까요? - 이종무

22. 지금의 일본은 과거에는 ‘작다’ 라는 뜻으로 ‘왜’라고 불렀습니다. 그 왜나라의 정식군사는 왜군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이들로부터 많은 괴롭힘을 당했는데요. 그러면 우리나라에 노략질을 일삼던 왜의 도적들을 부르는 말은 무엇일까요? 왜구

23.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정암 조광조 선생님께서 능주로 귀양을 가서 거기에서 한달만에 사약을 받고 절명하실 때 지으신 시입니다. 이 시에 나오는 구절에 의해서 심곡서원의 강당 이름을 ‘일소당’이라고도 했습니다. 이 시조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절명시

어버이 섬겨 사랑하듯 하였고

백성 걱정 돌보기를

식구걱정 돌보듯 하였노라

밝은태양 대지를 환희 밝혀주니

내 정성어린 속마음

거울처럼 비춰지네.

24. 정암 조광조 선생님을 제사 지내는(배향)서원은 심곡서원으로 정암선생이 부친의 장례를 모신 후 여막을 짓고 시묘하던 수지구 상현동에 있습니다. 이 서원은 1650년에 창건되고 같은 해에 사액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에도 없어지지(훼철) 않았습니다. 이 심곡서원이 2015년1월28일로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사적 몇 호로 지정 되었을까요?

사적530호

25. 고종이 13세 어린 나이로 조선의 제26대 임금으로 올랐을 때, 어린 고종을 대신해서 10년 동안 대리 청정을 하였습니다. 조선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을 맡게 되었는데, 그가 정치를 주도했던 19세기 후반 조선은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따라잡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한편에서는 개혁 정치가로,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인 국수주의자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고종임금님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흥선대원군

26. 조선은 건국 초부터 유교 중심 정책을 취하여 전국 각지에 많은 서원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서원은 지방에 있어서 남설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특권적인 것이 되어 전지(田地)와 노비를 점유, 면세·면역의 특전을 향유하면서 당론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집정 초기부터 서원의 비행과 불법을 낱낱이 적발케 하는 동시에 사설(私設)과 남설을 엄금하라고 지시했으며, 면세와 면천으로 조정의 재정에 부담을 주는 사원을 일제히 정리하여 전국에 사액 받은 서원 47개만 남기고 모두 철폐했는데(훼철) 이것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 서원철폐령

27 .상현동 심곡서원에 배향된 조광조 선생님의 시호와 관련 있습니다. 수지구 풍덕천동에 있는 이 중학교는 조광조 선생님의 시호를 따서 교명이 유래되었습니다. 심곡서원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학교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문정 (중학교)

28. 이분은 시호는 문간공이며 기묘명현 중 한사람이며 연산군 재위시절 갑자사화(1504년)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중종 때는 기묘사화로 조광조선생을 사사한 과오를 규탄하여 다시 유배 되었습니다. 이분은 ‘잘못을 저질렀으니 고치기를 꺼리지 마라(과즉물탄개)’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수지구 죽전동에 묘소가 있는 이분은 누구일까요? 십청헌 김세필

29. 조선 중종 때의 명현으로 호는 음애입니다. 기흥구 지곡동이 고향으로, 중종반정 후 홍문관 부제학, 승정원 승지, 우참찬을 지내면서 기묘사림인 정암 조광조 선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관직을 삭탈당하고 옥에 갇혔던 이분은 누굴까요? 음애 이자

30. 이분은 주민전권 대사와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전사로 참석한 뒤 군부대신에 임명되신 분으로 1905년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을사5적의 처형을 주장하고 조약파기를 요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자결하셨습니다. 이분은 누구일까요?

민영환 선생님

31. 을사조약은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우리의 외교권을 강탈하기위해 맺은 조약입니다. 그 후 일제가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을 이유로 우리의 군대를 해산했습니다. 용인의 인물인 김혁 장군도 이 군대에 있다가 군대가 해산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한 때는 언제 일까요? 1907년

32. 용인에는 여러 명의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1985년 김혁장군 순국 50주기를 기하여 경주김씨 문중에서 ‘오석 김혁 선생 독립운동기념비’를 제작하여 세웠지만 이리저리 옮겨다니다가, 기흥구 구갈동에 공원이 조성되면서 그곳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석이 세워진 공원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김혁 공원

33. 2008년 대한민국근대유산404호로 지정된 가옥입니다. 이 가옥은 장욱진화백이 생전에 거주했던 곳으로 대청 종도리에 묵서되어있는 상량문을 보면 광서20년 (1884년)에 지어진 가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옥 뒤에 있는 2층 양옥은 장욱진이 직접 설계하여 짓고 말년에 기거하였으며, 현대는 전시실로 이용되고 있는 이 가옥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34. 서봉사지는 광교산 동쪽에는 있는 고려시대 절터로 조선 태종때에는 천태종의 자복사로 지정되었을 정도오 유명한 사찰입니다. 이곳에는 고려 명종15년에 세워진 탑비가 남아 있는데 . 이절의 주지였던 스님의 행적을 후대에 알리고자 그의 문하생들이 세운 것인로, 보물 제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스님은 누구일까요? -현오국사

35. 기흥구 언남동에 있는 용인향교는 유교의 시조인 공자를 제사 지내기 위한 곳입니다. 공자의 위패는 대성전이라는 건물에 모셔져 있는데 ,이 건물의 지붕은 두면이 서로 맞대고 있는 지붕이라는 뜻의 ㅇㅇ지붕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지붕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할까요? 맞배지붕

36. 기흥구 상하동에는 ‘풍창 부부인 조씨의 묘소’가 있습니다. 풍창 부부인 조씨는 이 임금의 장모이며 인현왕후의 친정 어머니입니다. 경종과 영조의 아버지로 네 차례의 정치주도 집단을 바꿔가며(환국)정치를 하였습니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과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이 왕의 여러 부인들입니다. 이 임금은 누구일까요? 숙중

37. 부부인이란 호칭은 정1품으로 왕비의 친정 어머니와 왕의 적자인 대군의 부인에게 주는 작호입니다. 그렇다면 왕비의 아버지나 정1품 공신에게 주는 작호는 무엇이라 할까요? 부원군

38. 기흥구 보정동에는 삼국시대 고구려가 용인 지역에 세력을 떨칠 때부터 통일신라 시대까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무덤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학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있는 무덤들인데, 이처럼 아주 오래된 무덤들이 모여 있다는 뜻으로 이렇게 부릅니다. 이렇게 모여 있는 무덤들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보정동) 고분군

39. 이 산은 불교 경전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이며, 기흥구의 마북동, 청덕동, 언남동, 수지구 죽전동,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등 3개 구에 걸쳐있는 산입니다. 산의 형세는 신하가 임금에게 조례를 올리는 형상으로 명당이라고 하는 길지인데, 2002년부터는 이산의 이름을 딴 문화축제도 있는데 이 산의 이름은 무얼까요? 법화산

40. 수지구 신봉동의 이 행사는 1990년 수지구가 도시화 되면서 전통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의 뜻있는 분들이 전통을 지키기 위해 뜻을 모아 2003년부터 도시형행사로 매년 음력 1월15일에 지신밟기를 시작으로 주민 기원제와 소원지 쓰기, 풍등 날리기, 난타, 밸리댄스, 한국무용, 댄스 스포츠 등 행사를 해오고 있는데 이 민속놀이는 무엇일가요?

신봉동 정월대보름맞이

41. 번암 체제공 사후에 정조대왕이 채제공의 명복을 비는 글을 새긴 것으로, 1978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전액은 허목의 전서풍으로 기이하고 예스러운 맛이 나는데, 비문은 해서체로, 음기는 비의 앞면에 음각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의 이름은 무엇일가요?

- 채제공 뇌문비

42. 이 사람은 비운의 죽음을 맞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하였고, 이때부터 어지러운 당론을 없애는 의리를 밝히고 탐관오리를 징벌,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하며 권력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전력투구하였습니다. 수원 화성 성곽 축성에 모든 설계 및 경영을 지휘하였으며, 신해통공을 통해 백성들의 삶의 질을 크게 개선하고 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 번암 채제공

43. 이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한 이분은 호가 국은이며 본관은 전의입니다. 16세에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였고, 28세 때 영국·벨기에 공사관의 참사관으로 부임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전력을 다했으나 기울어져가는 대세를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1905년 5월 12일 형과 부인에게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먹고 순국한 이 사람의 순절은 여러 순국열사 가운데 가장 먼저 충군보국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 국은 이한응

44. ‘나비박사 석주명’이 이 사람의 그림속에서 무려 37종의 나비를 암수까지 구별해 낼 정도로 뛰어난 관찰력과 정확한 세필로 그린 나비그림이 특징으로, 병풍을 그릴 때 꼭 열 마리 이상은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려놓은 나비가 날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하는 이 사람은 본관은 의령이며 약천 남구만 선생의 6대손으로 철종과 고종 때 활동한 문인 화가였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 일호 남계우

45. 정조 때 지방유림의 공의로 사례편람의 저자인 도암 이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동면 천리에 창건하여 사액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습니다. 최근 도암 이재 선생의 후손들이 복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서원은 무슨 서원일까요? - 한천서원

46.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도암 이재 선생이 지은 관혼상제에 관한 종합참고서로, 사계 김장생의 <상례비요>의 체재를 참고하면서 관례와 혼례를 덧붙이고 여러 학설을 참고하면서 이 책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름 그대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사례참고서로서, 조선 후기에 가장 널리 보급된 예서로 평가되는 이 책의 이름은 무엇일가요? - 사례편람

47. 고려 시대 후기의 대 문장가인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명종이 신하들에게 <소상팔경>시를 짓도록 하였을 때 어린 나이로 장편을 지어 이인로와 더불어 절창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주필(글씨를 흘려서 빨리 씀)로 이름난 시인으로 무신의 난 이후의 피폐한 농촌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도원가>가 유명합니다. 이 사람의 묘 앞 하단에 고총이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순장자의 묘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 매호 진화

48. 1984년 1차로 호암미술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되어, 10세기를 전후한 가마터로 밝혀졌으며 우리나라 도자역사 편년을 10세기 전후로 끌어 올린 곳입니다. 발굴 과정에서 요벽, 건물지, 요지가 확인되어 대체적인 규모까지도 확인되었습니다. 고려시대 백자를 굽던 가마터로서 현존하는 유일한 곳입니다. 갑발과 도편 등의 퇴적물이 쌓여 작은 구릉을 형성하고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 서리중덕 고려백자 요업지

49.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의 군창이었던 곳으로, 몽골의 제2차 침공을 승장 김윤후와 부곡민들이 힘을 모아서 몽골군을 맞아 싸우던 중, 화살을 쏘아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함으로써 몽골의 제2차 침공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곳에서의 승리는 40여년에 걸친 항몽전쟁 가운데 최초의 승리이고 용인 지역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뭉쳐 이룩한 승리하는데 의의가 있으며, 후에 의병운동의 선구가 되었습니다. 1977년 10월 12일 경기도 문화재 사적 제 44호로 지정된 이곳은 어디일까요? - 처인성

50 주변 마을에서는 이 고분을 오래 전부터 고려장터라고 불렸으며 일부에서는 천장에 덮개돌이 있어 기반식 지석묘라 지칭하기도 하였으나 198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용인관내의 지표조사에서는 돌방무덤으로 분류하였습니다. 또한 1986년도 한양대와 경기도에서 실시한 백제지역문화유적 조사에서 이동면 서리 하반의 고분을 백제시대의 유물로 구분하여 처음에는 이 무덤도 그와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의 자료로 규정하였으나, 판석이나 할석을 이용하여 널을 안치하는 방을 만들고 널방벽의 한쪽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만든 뒤 봉토를 씌운 동남방향의 무덤으로 고구려 시대의 영향을 받은 무덤으로 확인된 처인구 운학동에 있는 이 무덤은 무엇일까요? - 운학동 돌방무덤

51.신라 문성왕 때 염거선사가 창건하였고,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3층석탑 1기와 보살상, 철인 3위를 조성하면서 중창하였습니다. 현재 철인 3위 중 1위는 도난당하고 2위는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 박물관에 있는데, 이 철인은 도선국사가 이곳의 산세와 자리에서 솟아나는 기운이 강해 이를 누르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합니다. 1990년에 본래의 사찰이 자리하였던 산 아래에 대웅전을 지으면서 윗채와 아래채로 전각이 나누어져 윗채에는 극락전, 산신각, 굴암 등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도선국사가 조성하였다는 파손된 3층 석탑이 남아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로 굴암절이라고도 불리는 이절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용덕사

52. 대한불교열반종의 총본산으로 부처의 공덕으로 민족화합을 이루기 위해 세운 호국사찰입니다. 현존하는 건물은 열반전, 대각전, 만불전, 범종각, 요사채 등이 있는데, 이 절은 머리만 8m에 이르는 거대한 불두와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온 통향나무로 다듬어 만든 길이 12m의 열반전의 와불, 세계 각국의 불교 성지와 우리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등에서 세계 각국 불교 신도들이 돌을 가져와 쌓아 올린 통일의 탑, 서울 올림픽 때 타종했던 무게 12톤에 이르는 통일의 종 등이 유명합니다. 이 절의 이름은 무엇일가요? - 와우정사

53. 처인구 남사면 봉무리 산정동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열리는 이 놀이는 풍농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민속놀이입니다. 주민 간 단합을 다지는 대동의 의미만의 아니라 당제와 같은 주술적 의미가 강한 엄숙함이 배어 있는 풍습으로, 먼저 두레가 대동우물에서 우물고사를 지내고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밟기를 하는데 집에 들어가 낭대를 세우고 마당 -> 우물고사 -> 장간고사 -> 부엌고사 -> 마당 순서로 진행됩니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이 암줄을 잡고 성인남자들이 숫줄을 잡고 시작하여, 여자가 지면 보리흉년이 난다는 속설 때문에 첫 번째는 남자가 이기지만 나머지 두 번은 여자가 이기는 놀이입니다. 이 놀이는 무엇일까요? - 산정동 줄다리기

54. 조선시대에 긴급한 통신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봉수입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을 피워 외적이 침입하거나 난리가 일어났을 때 위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였습니다. 봉화는 원래 밤에 올리는 횃불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낮에 올리는 연기도 포함해서 봉화라고 불렸습니다. 봉화는 전황에 따라 5번까지 올리는 5구분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봉수대마다 봉수대 5기가 있었습니다. 용인에도 봉수대가 설치되었는데, 원삼면 맹리의 건지산 봉수대와 포곡읍 마성리에 이 봉수대가 있었습니다. 마성리와 삼가동과 동백을 잇는 산의 이름이기도 한 이 봉수대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성석산봉수대

55. 용인의 정중앙에 위치한 처인구의 행정동으로서 중앙동, 역삼동, 유림동이 있습니다. 중앙동에는 남동과 김량장동이 있고, 유림동은 고림동과 유방동을 합쳐진 이름입니다. 역삼동은 역북동과 삼가동을 합쳐 부르는 명칭입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인면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용인면 이전에 부르던 이곳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수여면

56. 일제강점기인 1930년 12월에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가 여주의 쌀을 수탈하려는 목적으로 부설한 이 철도는 1942년 수인선과 함께 조선철도에 양도되어 두 선을 합쳐 경동선이라 불렸다가 광복이후 교통부 철도국 소유로 변경되었습니다. 1971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여 1972년 3월 31일에 전 구간이 폐선되었습니다. 용인에는 덕곡역, 신갈역, 어정역, 삼가역, 용인역, 마평역, 양지역, 제일역 등이 있었던 이 철도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 수여선

57. 오늘 포은 문화제를 열리고 있는데, 오늘의 주인공인 포은 정몽주 선생의 종손으로 일제 말기 학병으로 끌려갔지만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만주동포의 교육을 위해 헌신한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 정철수

58. 이동면 어비리는 지형이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생겼다고 하여 옛날부터 어비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는 묵리, 서리, 천리에서 흐르는 물이 어비촌 한가운데로 흘려들자 1972년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습니다. 송전에서 묘봉리로 들어서는 언덕길에서 보이는 넓은 수면위에 해가 붉은 빛을 드리우다 사라지는 모습이 아름다워 용인8경중 2경으로 선정하고 있습니다. 해지는 이 모습을 4자의 한자어로 무엇이라고 할까요? - 어비낙조

59. 이것은 용인시가 새 청사를 건립하면서 시민들의 문화복지를 실현하고 다양한 문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시설로 접근성이 용이한 이곳에 건립한 것으로, 공연장, 전시실, 회의실을 갖추고 있습니다. 3층에 위치한 마루홀은 300석 규모의 공연장으로 아동극 가족극 위주의 다양한 공연물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마루’라는 이름처럼 온 가족이 행복하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하고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 용인시문화예술원 , 문화예술원

60. 용인시의 인구가 늘고 공연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89년 용인 지역에 규모를 갖춘 공연장으로 처음 설립된 것으로 개관 이래 지역의 굵직한 각종 문화행사들을 소화하며 용인시민의 문화향유의 장으로서 기능을 하던 곳입니다. 2000년대 들어서 수지여성회관, 죽전야외음악당, 포은아트홀과 같은 새로운 공연시설이 들어서면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아지게 되었지만 용인 동부 지역의 공연문화의 중심으로서의 위상을 지켜온 이곳은 어디일까요? -용인문예회관 처인홀

61. 숙종 때 소론의 거두로 자는 운로, 호는 약천, 본관은 의령입니다. 효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 좌윤을 지냈습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윤휴 · 허견 등 남인들의 횡포를 상소하였다가 오히려 남해로 유배되었습니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까지 지냈고,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릴 것을 결정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일생을 보냈습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 한 수가 《청구영언》에 전합니다. 이 분은 누구일까요?

정답: 약천 남구만

62.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3학사 중 한 사람입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척화를 주장했습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청나라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요구하자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서 윤집, 홍익한 등과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이 분은 누구일까요?

정답: 추담 오달제

63. 사주당 이씨는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학문을 장려하는 부모 아래에서 사서삼경을 섭렵하였습니다. 출가하여 네 아이를 낳아 기른 경험을 바탕으로 삼고,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한권의 책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글이 완성된 후 아들 유희가 장과 절을 나누고, 한글 해석글을 덧붙여 태교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완성하였는데 이 책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태교신기

64. 이 사람은 조선 숙종·영조·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입니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죽산에서 난을 토벌하여 분무공신 1등공신이 되었고 영조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의 무덤은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무덤 앞에 보기 드물게 무인석이 세워져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답: 오명항

65. 이것은 해주 오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중기 오희문의 일기집입니다. 선공감 감역을 지낸 오희문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곳으로 피난하며 10여 년간 쓴 일기로 보물 1096호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개인의 사적인 일을 기록한 일기지만 당시의 전란상황, 사회상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기록들이 함께 남아 있어 중요한 연구 자료이기도 한 이 책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쇄미록

66. 조선시대에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기어 궁가, 종묘, 문묘, 향교, 서원 등의 건물 앞에 세웠던 이 비석은 무엇일까요?

정답: 하마비

67. 교통수단의 발달사와 문화를 학습할 목적으로 세운 우리나라 유일의 교통전문 박물관입니다. 처음에는 자동차 박물관으로 시작하여 주요 컨셉인 국내외 희귀자동차 30~40여점의 전시물 외에 오토바이, 자전거, 마차 등의 실물과 모형을 전시하고 있으며, 각종 부품과 자동차 장식품 700여점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교통문화의 이해와 어린이 교통안전캠페인 및 교육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정답: 삼성화재교통박물관

68. 조상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등잔을 모아 전시하고, 등잔문화를 알리기 위하여 수원 화성성곽의 이미지를 따서 외형을 건축하여 설립한 등잔 전문 박물관입니다. 지하1층, 지상 3층 가운데 1·2층은 전시공간이며 지하층은 세미나 및 각종 공연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전시실에는 300여점의 등잔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정답: 한국등잔박물관

69.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삼림욕, 등산, 생태체험, 숲속놀이 등을 통해 자연을 만끽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곳으로 지속가능한 산림자원의 보존과 이용을 도모하고, 산림의 진정한 가치를 폭넓게 인식시킴으로써 시민들의 건강증진과 정서함양에 기여하고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정답: 용인자연휴양림

70. 섬유미술과 판화 작품을 통해 예술감상과 미적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현대 섬유 미술 및 판화전문 미술관입니다. 설립자 송번수 관장의 작품 외에 박길웅, 박서보, 윤형근의 작품이 주요 소장품을 이루고 있는 이 미술관은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마가미술관

71. 이곳은 본래는 쇄포면(灑布面)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삼으로 직조한 베와 목화에서 뽑아낸 실로 직조한 무명 천을 잿물에 삶아내고 물에 담궜다가 햇볕에 널어 빛이 바래도록 포쇄하던 곳이라고 한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 후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해를 능원리에 안장한 후부터는‘충신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이것으로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지역은 어디일까요?

정답: 모현

72. 조선의 왕능, 종묘, 향교나 서원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문으로.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지붕이 없이 윗부분에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우고 중간에는 태극 문양을 그려 놓았습니다. 이문은 밖으로부터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고 신성한 공간으로 진입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 문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정답: 홍살문

73. 조선시대에 지방의 유림에 의해 만들어 진 사립학교는 서원입니다. 지역민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인물이 태어나거나. 살았거나. 묘가 있는 곳에서 서원을 세워 지사를 지내고 학생들이 공부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은 조선 선조 9년(1576) 이계, 이지를 비롯한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몽주 선생과 조광조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서원으로 처음에는 죽전동에 세워져 이름도 <죽전서원>이라 불리다가 임진왜란 때 건물이 소실되어 선조 38년에 정몽주 선생의 묘소아래 중건되었습니다. 오늘의 행사의 주인공인 포은 선생님을 주 배향 인물로 하는 모현에 있는 서원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충렬서원

74. 차경의 원리를 바탕으로 옛 지형을 복원하고 석단, 정자, 연못, 담장 등 건축요소를 담고 있는 정원으로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듯한 자연이 어우러지는 이곳은 호암미술관 내에 있는 전통정원입니다. 사계절이 다 아름답지만 특히 봄의 벚꽃으로 유명한 이곳 정원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희원

75.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이었던 서원은 현재 제향기능만 남아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포은선생을 모시고 있는 충렬서원에서도 싱그러운 봄과 풍성한 가을이 되면 선현께 제를 올리는데 이것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정답: 향사

76. 모현면 능원리 안골마을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입니다. 그러나 농토가 넓지 않아 특용작물이나 신지식 농업으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곳은 매년 가을이면 호박을 테마로 다양한 호박음식과 체험을 즐길 수 있는 축제를 개최하는데 호박 탈 만들기, 호박 초콜릿 만들기, 호박인절미, 호박 들고 릴레이 등이 펼쳐지는 이 축제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호박등불마을축제

77. 1922년 카톨릭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서 1951년 대구 대교구 김천 천주교 주임신부를 지내고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조의 추기졍이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봉사하는 마음과 한국의 아픈 역사 현실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젊은 지식인과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셨던 이 분은 2009년 2월 선종하시고 모현면 오산리 용인천주교묘역에 안장 되었다. 이분이 누구일까요?

정답: 김수환 추기경

78. 2004년 11월에 처음으로 이곳에 용인의 전철역이 개통되었습니다. 2011년 12월에는 지하철 분당선의 연장으로 죽전 ~기흥 구간 (총 5.1km)에 기흥 신갈 구성 보정 죽전역이 개통되어 전철이 운행 중에 있습니다. 현재는 신분당선의 연장으로 동천역, 수지구청역, 성복역, 상현역, 광교역 등 성남에서 수지를 지나 수원까지 이어진 지하철 노선이 개통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용인에 처음으로 개통된 전철역은 어디입니까?

정답: 보정역

79. 용인시 수지 광교산과 구성법화산에서 시작되어 성남시를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총 90리의 한강 제 1지류인 이곳은 18만년을 산 삼천갑자 동방삭이 염라대왕이 보낸 저승사자에게 잡혀갔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정답: 탄천

80. 용인의 미래는 사람중심의 참여 행정으로 소수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약자를 보듬어 주며 우리시의 모든 시민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용인을 만들어 가자고 하는 뜻에서 만든 현재 용인시의 슬로건은 무엇일까요?

정답: 사람들의 용인

81. 학교와 학교 주변 200m이내의 구역에 대하여 안전하고 위생적인 식품판매 환경의 조성으로 어린이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지정 운영하고 있는 일정한 구역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정답: 어린이 식품안전보호구역(그린푸드존)

82. 이것은 지하철과 버스의 단점을 보완한 교통수단으로써 주로 15~20km의 도시구간을 운행하며 수송능력이 우수하고 대기오염 및 진동소음이 적은 친환경 첨단 교통수단입니다. 용인에도 기흥역부터 에버랜드전대역이 개통되어 운행 중에 있습니다. 이 교통수단의 대표적인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경(량)전철 에버라인

83.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3백년동안이나 명성과 문화의 중심지역이 되어 유풍이 크게 떨치고 학자가 무리지어 나왔으니, 하나의 작은 중화였다”라고 하여 우리나라 학문의 중심지로 평가한 이 도는 어디일까요?

정답: 경기도

84. 조선 중종 때의 명현인 정암 조광조 선생을 비롯하여 유학자로 식견이 높았던 방은 조광보, 희곡 조광좌, 음애 이자 선생 등 네 분이 도의로 친분을 맺고 은거하며 노년생활을 즐기기 위해 기흥구 지곡동 두암산에 정자를 건립하였습니다. 이 정자는 무엇일까요?

정답: 사은정 (네가지 은혜로운 일-나물캐고 나무하고 밭갈고 낚시하고)

85.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숙박문제 해결과 문화국가 이미지 구축을 통한 관광활성화를 위해 전통사찰에 머물면서 전통문화와 수행생활을 체험하는 상품으로 용인에서는 법륜사에서 이것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국내외 관광객에게 우리나라 전통문화체험의 대표적인 문화콘텐츠로 자리매김한 것은 무엇일까요?

정답: 템플스테이

86.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미디어 퍼포먼스 예술가로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입니다. 조각가, 행위예술가인 이 분은 1960년대 이후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의 예술가들 중 가장 도발적이고 혁신적인 인물로 2008년 10월 용인시 기흥구에 그의 미술관이 공식개관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답: 백남준아트센터

87. 이 분은 어렸을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학문을 장려하는 부모 아래에서 사서삼경을 섭렵하였습니다. 출가하여 네 아이를 낳아 기른 경험을 바탕으로 삼고, 여러 자료를 수집하여 ‘태교신기’를 정리하였다. 글이 완성된 후 아들 유희가 장과 절을 나누고, 한글 해석글을 덧붙여 태교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태교신기』가 완성되었다. 이 분은 누구일까요?

정답: 사주당 이씨

88. 이 분은 1875년 기흥구 농서동에서 태어났습니다. 24세에 대한제국 무관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육군장교가 되었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1919년 용인에서 3`1만세를 주도했다고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자 만주로 망명하여 홍범도 장군과 의용군을 조직해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뛰어 들어 청산리 대첩을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성동사관학교 교장을 맡아 부교장인 김좌진 장군과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기도 했습니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9년간의 옥고를 치르다 1939년 64세의 나이로 순국한 이분은 누구일까요?

정답: 김혁 장군

89. 이분은 항일의병이라 부릅니다. 처인구 양지면 출신으로 1907년 희미해가는 정국을 개탄하고 포군 32명을 모집하여 의병대를 만들어 일본 기병대와 접전을 벌여 격퇴하였습니다. 그 후 이천, 광주, 용인, 죽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크게 위세를 떨쳤던 바, 봉기한 이후 이천읍 우편소와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고, 용인의 굴암사[지금의 묵리 용덕사]에서 일본 토벌대와 교전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혁혁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중 1907년 11월 10일 수원수비대에 체포되어 당년 36세 나이로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분은 누구일까?

정답: 옥여 임경재

90. 회화 조각 도예 설치 등 현대 미술 전반에 걸친 작품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전시하는 미술관입니다. 2,281m부지에 실내 전시실과 야외전시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장품은 약 140여점으로 대부분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들입니다. 이곳의 교육 프로그램은 1983년부터 지속적으로 미술문화의 저변확대와 향상을 목적으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교양강의와 실기로 이루어져 오고 있는데, 오랜 역사와 활발한 활동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정답: 한국미술관

91. 한국 현대 미술의 새로운 가능성과 생명력을 모색하기 위해 세운 전문현대미술관입니다. 시설과 소장품면에서 경기도내 개인 미술관으로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합니다. 소장품은 한국화, 서양화, 판화 등을 합해 모두 20400여 점으로 이중 민족혼의 화가로 불리는 내고 박생광의 그림과 스케치만 하더라도 100여점에 달해 최대 소장처라 할 수 있습니다. 전시와 연구활동을 위하여 41,200종에 이르는 국내외 전시도록 및 미술사 자료를 소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정답: 이영미술관

92. 기흥구 보라동에 위치한 전통적인 민속문화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야외민속박물관으로 우리조상의 슬기와 지혜가 스며있는 전통생활 모습을 총체적으로 재현해 놓은 곳입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는 현장학습의 장으로, 한국을 찾은 외국 관광객에게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체험의 장으로 각광받고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정답: 한국민속촌

93.미래 주역인 어린이에게 문화마인드를 높여주고 다양한 체험전시를 통해 어린이의 창조적감성과 이성개발을 위해 경기도에서 용인시 기흥구에 2006년부터 건립을 시작하여 2011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세계 100대박물관을 목표로 운영 중인 어린이를 위한 국내 최대 박물관은 어디일까요?

정답: 경기도어린이박물관

94. 조선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입니다. 세종 23년(1441)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14년간 집현전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황해도 관찰사·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성종대에는 손성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그의 묘는 포은 정몽주의 묘역 오른쪽에 있는데, 묘역 안에는 묘비·문인·석·향로석·상석(제사지낼 때 음식을 차려 놓도록 무덤 앞에 마련해 놓은 돌) 등의 석물이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포은 정몽주의 증사위가 되기도 하는 이분은 누구일까요?

저헌 이석형

95. 여성의 아름다움과 전통의 멋을 이해하고, 여성문화와 차문화에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 연구,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화장품 전문 박물관입니다. 1979년 서울에서 화장사관으로 시작하여 1997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해 확대, 개편하였습니다. 차문화전시실, 여성문화전시실, 기획전시실 등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통사회에서 사용한 여성의 장신구와 화장용구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차문화에 관한 유물 1천여 점을 전시하고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정답: 아모레미술관

96. 이곳은 고고·역사 분야와 민속·복식분야 중심으로 소장품을 다수 확보하여 연구, 전시활동을 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대학박물관으로는 유일할 정도로 출토복식유물에 대한 보존처리시설을 갖추어 복식유물의 연구, 전시, 보존과 복원 등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주요유물은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의사의 유묵을 비롯하여 중요민속자료 제1호 덕온공주 당의를 포함한 1백여 점의 중요민속자료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일까요?

정답: 단국대석주선기념관

97. 동백지구 택지개발사업의 발굴조사 결과 역사적 보존가치가 인정된 구석기 문화층을 이전 복원 전시하여 설립한 용인의 첫 시립유적 전시관입니다. 전시자료는 동백지구에서 발굴된 구석기 유물을 비롯해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용인 곳곳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진 도자기 생산활동의 증거물과 역사인물의 활동자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시를 이해하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어린이, 가족, 학교연계, 특별교육 등)도 활발히 운영하고 있는 여기는 어디일까요?

정답: 용인문화유적전시관

98. 용인은 예로부터 서울에서 영남지방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은 한양에서 동래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로인 역로가 수지에서 백암까지 용인을 관통하여 지나갔습니다. 이것은 서울에서 영남까지 사람과 물산의 왕래뿐 만 아니라 외침의 이동로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 길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정답: 영남로

99.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대한 저항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활발히 전개 되었습니다. 이 분은 용인 출신으로 만주의 독립운동 조직인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한 김혁 장군과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독립군 투쟁의 지표를 제시하였습니다. 이 분은 누구인가요?

정답: 여준 선생

100. 용인시청 광장에서 정보통신기술과 게임산업이 융합된 창조경제 및 건전한 스포츠 문화정착 우수과학인재 양성에 기여하고자 열리는 축제로 과학영재 체험 한마당, 사물인터넷 체험관, 드론체험관 휴머노이드 로봇체험관등 기초과학이 어우러지는 축제는 무엇일까요?

정답: 용인사이버축제

101. 1905년 11월 유근은 황성신문에 장지연과 함께 일제의 침략과 을사오적을 통렬히 질타한 논설입니다. ‘이 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뜻으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11월 17일 대신들을 압박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조약 체결에 찬성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대신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논설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정답: 시일야방성대곡

102. 조선 중종 때의 명현인 정암 조광조 선생을 비롯하여 유학자로 식견이 높았던 방은 조광보, 희곡 조광좌, 음애 이자 선생 등 네 분이 도의로 친분을 맺고 은거하며 노년생활을 즐기기 위해 기흥구 지곡동 두암산에 정자를 건립하였습니다. 이 정자의 이름을 사은정이라고 하는데, 사은은 4가지 일을 낙으로 삼아 여생을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네 가지 일은 무엇일까요?

정답: (네가지 은혜로운 일-나물캐고 나무하고 밭갈고 낚시하고)

103. 단오는 우리나라 5대 명절중의 하나로, 모내기가 끝날 무렵 음력5월5일에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풍년을 기원하며 하루를 즐기는 민속명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농업중심의 사회구조가 바뀌면서 전통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던 포곡읍 주민들이 나서서 창의적으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문화제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경안천변에 위치한 삼계리발전협의회가 주관하여 사라진 우리늬 민속을 되살리고 지역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해마다 음력단오에 개최하는 이 행사는 무엇일까요?

포곡창포축제

104. 용인자연휴양림에는 용인에 연고가 있는 작고한 문인들의 문학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용인시에서는 용인자연휴양림을 조성하면서 조경사업의 일환으로 모두 열 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시비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이중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시인으로 ‘나그네’가 문학비로 남아 있습니다. 이 시인은 누구일까요?

박목월

105. 기미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이며 1908년 11월 잡지[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로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한국현대시를 태동시킨 선각자로 불리는 분의 묘소에 용인시모현면에 있습니다. 한 때 친일 행적으로 오명을 남기기도 했지만 그의 문학적인 업적은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긋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육당 최남선

106. 유형원선생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겪은 농민들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여 양대 전란으로 인한 파괴와 좌절, 이로 인한 사회적 모순, 전반적 경제침체와 동요로 인한 집권체제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심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저작입니다. 총26권 13책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선생이 부안에 22년동안 살면서 백성의 생활과 사회 실상을 직접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부민, 부국을 이루기 위한 개혁안입니다. 이책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107. 좌전고개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1일 새벽3시 주민 1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어난 용인최초의 독립만세운동입니다. 이를 기화로 용인 전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었고 연인원 1만3천 2백여명이 참여해 35명이 사망하고 139명이 실종되는 등 총 741명이 휘생되었습니다. 용인시는 3.1만세운동을 기면하고 만세운동의 역사적의미를 되새기면서 이를 창조적으로 게승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고자 2011년 좌전고개 일대에 기념탑과 기념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이 공원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3.1만세운동기념공원

108. 1979년부터 백암면 옥산리 일대에 부지를 조성하고 시설을 갖추어 2003년 4월 정식으로 개원한 사립 식물원입니다. 야생식물의 보고라고 일컫어질 만큼 복수초, 깽깽이풀, 한라구절초, 뻐꾹나리 등 희귀식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데, 자생식물 2400여종을 비롯해 외래식물7,300여 종을 보유하고 있는 식물원입니다. 이 식물원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한택식물원

109. 불교 경전의 하나인 법화경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구성지역의 중심 산입니다. 기흥구의 마북동 청덕동 언남동, 수지구의 죽전동 그리고 처인구의 모현면 오산리 등 3개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한강 지류인 탄천의 발원지이기도 합니다. 2002년부터 뜻있는 분들이 모여 축제를 개최하여 지역민들이 한자이레 모여 애향심을 고취하고 주민화합과 지역발전을 도모한는 문화 행사도 지내는 이 산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110. 용인에는 나라에서 세운 관학으로 용인향교와 양지향교의 2개의 향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세운 사학으로 3개의 서원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때 세워진 이 3개의 서원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충렬서원, 심곡서원, 한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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